책소개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황현의 ≪매천야록≫, 김윤식의 ≪속음청사≫와 더불어 구한말의 3대 사찬 역사서다. 총 7권 9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다른 사서와 달리 구한말 역사를 편년체 방식으로 잘 정리해 구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제목이 달려 있어 관련 사건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문답식으로 기술해 전개가 지루하지 않으며, 당시 긴박했던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긴장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구성과 전개뿐만 아니라 사료로서 가치도 충분하다. 자신이 몸담았던 독립협회 관련 기록은 전체의 30%를 넘는 만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어 독립협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또한 나름의 기준으로 인물평을 했는데 당시 활동한 인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제1권은 1864년 1월 고종이 즉위한 후부터 1893년까지를 다룬다. 주요 사건으로는 고종의 즉위,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병인양요·신미양요,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이다. 제2권은 1894년 2월부터 1897년 12월까지다. 이때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을미사변·아관파천 등이 있었다. 더불어 독립협회의 결성 과정과 대한제국 성립 과정을 꼼꼼하게 다뤘다. 제3권은 1898년 1월부터 12월까지다. 독립협회를 비롯해 만민공동회의 활동이 주요 내용이다. 제4권은 1899년 1월부터 1903년 12월까지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의 정치 상황, 자신을 포함한 독립협회 17인의 투옥 상황 등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광무개혁의 내용과 그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덧붙였다. 제5권은 한국이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을 당하는 1904년 1월부터 1905년 12월까지다. 러일전쟁의 전개 과정과 대한제국의 대응, 그리고 일본의 승전과 국권 침탈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제6권은 1906년 1월부터 1907년 12월까지다. 통감부 설치 과정과 내정간섭, 의병 운동과 최익현의 순국, 이용익과 이근택의 암살 사건,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과정과 의미 등을 비중 있게 다뤘다. 제7권은 1908년 1월부터 1910년 8월까지다. 특히 안중근의 의거, 이토의 장례, 안중근의 재판 과정 등은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고 있어 안중근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일제가 한국을 침탈해 가는 과정과 친일 세력들의 활동 사항, 민중의 저항 등을 다루며 1910년 8월 국권 피탈 과정을 자세히 서술해 역사 기록으로 남겼다.
200자평
고종 1년(1864)부터 대한제국 멸망(1910)까지 조선 시대 말년의 역사를 다룬다. 당대 지식인 정교가 ≪관보≫, 신문류, 각종 상소, 주한 외국 공사관의 기록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비판적 관점에서 기록한, 격동하는 당시 사회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이 책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전체 분량의 4분의 1을 발췌 번역했다.
지은이
정교는 1856년 7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났고 1925년 3월 15일 이리(현 익산)에서 사망했다. 당시는 전통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 질서가 잡혀 가는 전환기였고 외세의 침략에 위협받고 결국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겨 가던 시기로, 그는 충군애국을 실천하려는 삶을 살았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 1894년 8월 제1차 김홍집 내각의 궁내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4월 수원 판관을 거쳐 7월에 황해도 장연 군수에 임명되었지만,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사임했다. 그는 외세에 자주독립 국가가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했으며, 그 결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가해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을 외쳤다.
1925년 익산에서 70여 년의 생을 마감했다. 이곳에서 정교는 자신의 생애와 함께했던 대한제국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대한계년사≫를 집필했고, 이를 통해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는 데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옮긴이
이계형은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 입학해 수학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대한제국기 통감부의 식민교육정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중앙대·경원대 등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전문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전임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대사를 전공하고 있다.
≪고종황제의 마지막 특사, 이준의 구국운동≫, ≪통감부 설치와 한국 식민지화≫(공저) 등의 전문서를 펴냈고, 이 외에 아동 대중서로 ≪왜 고종황제는 폐위되었을까≫, ≪왜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까≫ 등을 집필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권1
권2
권3 상
권3 하
권4 상
권4 하
권5
권6
권7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나라가 나라답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자립해 다른 나라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 힘으로 학문을 닦아 한 나라의 정치와 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145쪽
그는 자기의 옛 주인 민영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로 가서 통곡하다가 귀가하여 종일 목 놓아 큰 소리로 울었다. 인력거를 끌어내 이를 세 준 주인 김 참령 집 안에 넣어 놓고, 그날 밤 경우궁 뒷산 기슭 소나무에 목을 메달아 죽었다.
-374쪽
재판장은 “본국을 떠난 후 3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떳떳하게 “내가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해외 동포들을 교육하는 것이고, 둘째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라고 대답했다. 또 재판장이 “독립사상이 언제부터 일었는가?”라고 묻자, 안중근은 “몇 년 전부터 독립사상을 품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 힘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러일전쟁 당시 일본 천황 폐하의 선전 조칙 중에 ‘한국의 독립을 돕고 동양 평화를 유지한다’는 말이 있었다. 한국의 일반 백성들은 감격해 일본군의 승리를 축원했다. 수천 리 먼 길을 군량과 무기를 나르고 도로와 교량을 닦고 만들었다.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가 성립된 결과 일본군이 개선하자 한국인들은 마치 자기 나라 군대가 개선해 돌아온 것처럼 환영하며 한국의 독립이 확고하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뜻밖에도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대사로서 한국에 와 많은 금액을 나라의 역적 일진회 두령 몇 명에게 주고는 그들을 사주해 소위 ‘선언흉서(宣言凶書)’를 발표케 하고, 또한 병력으로 황실과 정부를 위협하며 ‘5조약’을 제창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재가치 않으셨고 참정대신 또한 조인치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소위 ‘오적’이라 일컫는 다섯 명의 대신만이 날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무효인 조약인데 온전히 성립되었다고 칭하고 당당히 우리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했다. 4000년 국가와 2000만 백성들은 어육(魚肉)의 신세가 되었는데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74~475쪽 ‘안중근이 합이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다’
이완용과 윤덕영이 두 조칙<즉 8월 22일과 29일 조칙>을 내놓고 옥새를 찍으라고 폐하를 몰아세웠다. 폐하께서는 어찌할지를 몰라 하셨다. 김윤식만이 유독 나서서, “생각건대 우리 한국은 폐하 한 분의 나라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 양여하는 것을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완용과 윤덕영은 일본인의 지시를 받고 곧바로 김윤식과 여러 사람들을 쫓아냈다. 마침내 옥새를 가져다 문서에 찍었다<그때 일본인들이 옥새를 통감부로 가져갔다>.
-5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