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 동화선집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동화 특선, 김병규의 <꽃으로 성을 쌓은 나라>
이제 그만 칼을 푸시죠
아이가 말했습니다. 장군이 먼저 가슴에 품었던 칼을 끌렀습니다. 병사들도 허리춤에 숨겼던 칼을 풀었습니다. 꽃이 불붙듯 피었습니다. 향기가 가슴 깊은 데로 파고듭니다. 모두 코를 벌름이며 꽃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김병규는 칼을 녹이는 꽃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아직 피지 않은 꽃일 뿐입니다.
장군은 말고삐를 바투 잡았습니다. 말은 히히힝 울며 앞발을 번쩍 쳐들었습니다. 말을 타고 뒤따르던 병사들도 먼지를 일으키며 차례로 멈춰 섰습니다.
“큰 언덕 너머에 작은 언덕이 있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조그만 나라가 나온다. 그 조그만 나라만 무찌르면 이 세상은 다 내 손아귀에 들게 된다.”
장군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병사들은 칼을 뽑아 흔들며 와와 함성을 질렀습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들은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습니다.
“네가 가서 동정을 살피고 오너라.”
장군은 아주 날쌔게 생긴 척후병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지며 척후병이 언덕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말 등에서 내려와 풀밭에 누웠습니다.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말들은 묵묵히 풀을 뜯었습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말들도 전쟁터에서 잘 길들여져 곧 벌어질 싸움에 대비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장군만은 그냥 말 위에서 척후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뒤, 척후병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습니다.
“장군님, 조그만 나라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성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까짓것, 돌성이나 흙성은 아무리 높아도 우리는 넘을 수 있다.”
“그런 성이 아니었습니다.”
“성 밖으로 둘러서 못을 파 놓았더냐? 강물이 가로막고 있더냐? 아무리 깊은 못과 강이라도 우리는 건널 수 있잖나.”
“물은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이람.”
부하의 말을 귀담아들을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장군은 대수롭잖다는 듯이 허허 웃었습니다.
척후병은 어물어물하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병사들은 어느 사이에 말을 타고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자, 출동이다!”
병사들은 공격 진영으로 바꾸었습니다. 앞머리에 선발대가 나서고, 그다음에 호위군에 둘러싸인 장군이 자리했습니다. 장군 뒤를 수많은 병사들이 따랐습니다. 그 위세가 산을 무너뜨릴 듯했습니다.
큰 언덕을 넘었습니다. 이제 작은 언덕만 넘으면 기름진 들판이 나옵니다. 이 들판 가운데에 조그만 나라가 있다고 척후병이 말했습니다.
작은 언덕에서 곧바로 달려 단숨에 공격하자고 장군이 참모들과 작전을 짰습니다.
드디어 작은 언덕 위에 올라섰습니다. 여기서부터 쏜살같이 달려 공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모두 우뚝우뚝 서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말들이 앞발을 딱 버티고 서서 머리를 쳐들 뿐, 도무지 나아갈 생각을 아니했습니다.
“어찌 된 노릇이냐?”
장군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습니다. 숱한 전쟁을 치러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조그만 나라를 내려다보던 장군은 그만 입을 딱 벌렸습니다. 조그만 나라를 빙 둘러싼 나지막한 성 위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저게 바로 소문에 듣던 불성입니다.”
참모장이 아는 척하였습니다.
“불성?”
장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네, 불성이 틀림없습니다. 불성을 함부로 공격하다가는 우리 모두가 불에 타 죽고 말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부르르 떨었습니다. 모두들 겁먹고 슬그머니 꽁무니 빼려고 눈치를 살폈습니다.
조그만 나라의 온 들에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오르고 있었습니다. 개미처럼 조그마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아지랑이 속에서 개미처럼 부지런히 밭에 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장군은 옆에 있는 참모장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부하였습니다.
“불을 이기는 것은 물밖에 없습니다. 저 불성도 여름에 소나기를 몇 차례 맞고 나면 허물어질 것입니다. 일단 돌아갔다가 가을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좋다. 두고 보자.”
장군은 속이 쓰렸지만 말머리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숱한 전쟁을 치렀지만 후퇴 명령을 내리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제 나라에 돌아온 장군은 더 많은 병사들을 모았습니다. 그 병사들을 여름 내내 불볕더위 아래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다만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좋아서 병사들을 푹 쉬게 하였습니다.
드디어 가을이 되었습니다.
장군은 군대를 일으켜 조그만 나라를 치러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병사들도 오랜만에 싸움터에 나서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다 아는 길이라 척후병을 보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장군이 맨 앞에 서서 단숨에 큰 언덕을 넘고, 작은 언덕까지 달렸습니다. 작은 언덕 위에서 칼을 뽑아 든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저건 또 뭐야?”
병사들도 눈을 비비며 살폈습니다.
조그만 나라의 나지막한 성에는 활활 타던 불꽃이 꺼지고, 주먹만 한 불덩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장군님, 저 불덩이는 불꽃보다 더 무섭답니다. 저기에 갑옷 자락이나 말 꼬리가 스치면 당장 불이 옮겨 붙고, 칼이 닿으면 펑펑 터지지요.”
참모장의 말을 듣고 장군은 이를 뽀드득 갈았습니다. 그러나 또 말머리를 돌릴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두 번이나 물러난 장군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분하고, 백성들 보기가 부끄러웠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조그만 나라를 무찔러 항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장군이었습니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
참모장에게 장군이 물었습니다. 먼젓번 일로 체면이 구겨진 참모장도 끙끙 앓으며 별의별 궁리를 다 하였습니다.
“한 가지 좋은 수가 떠올랐습니다.”
“좋은 수라니?”
“정탐꾼을 보내 불성의 비밀을 샅샅이 캐 오면 어떨는지요?”
“정말 멋진 생각이다.”
장군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오랜만에 허허허 너털웃음을 웃었습니다.
장군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병사를 뽑아 조그만 나라로 보냈습니다. 성공해서 돌아오면 계급을 올려 주고 많은 상을 내리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병사는 장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다음, 나그네 차림으로 떠났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났습니다. 열흘이 지났습니다. 장군은 그 병사가 돌아오기를 초조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약속 날짜가 지나도 그 병사는 장군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본색이 탄로나 감옥에 갇혀 못 오는 걸까요?”
“그런가 봐.”
장군은 울화통이 터졌지만 꾹 참았습니다.
또 다른 병사를 골라 보냈습니다. 장군은 더 큰 상을 걸었습니다.
두 번째 병사는 큰소리를 치며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믿을 놈이 없구나. 참모장, 그대가 다녀오라.”
“좋습니다. 조그만 나라의 나지막한 성의 비밀을 알아냄은 물론, 그 녀석들도 잡아 대령하겠습니다.”
“역시….”
장군은 참모장의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남에 따라 장군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참모장마저도 끝내 감감소식이었습니다. 장군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차라리 전쟁에서 크게 졌다면 이토록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무렵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란다.”
“병사 둘과 참모장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조그만 나라 백성들에게 붙잡혀서가 아니라더군요. 너무 살기 좋아서 그대로 주저앉은 거래.”
어른 아이 없이 끼리끼리 모여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그 소문이 장군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장군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적의 속사정을 살피고 오마.”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우리도 장군님과 함께 가겠어요.”
병사들은 은근히 장군을 걱정하는 체하였습니다.
“좋다.”
조그만 나라에 한번 가 보고 싶어 하는 병사들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면서도 장군은 짐짓 그러라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들 갑옷을 벗어 버리고 허름한 옷을 입었습니다. 농사꾼 차림으로 꾸몄습니다. 그러나 만약을 생각해서 칼은 한 자루씩 품속에 숨기고 떠났습니다.
며칠을 걸어서 조그만 나라에 다다랐습니다.
조그만 나라는 무서운 불성으로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성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던 나지막한 성은 온갖 과실나무들로 이뤄진 울타리였습니다. 꽃들이 불붙듯이 피어 있었습니다.
꽃향기가 가슴 깊은 데로 파고들었습니다. 마음 속속들이 맑게 헹구어 주었습니다. 모두들 코를 벌름이며 자꾸자꾸 꽃향기를 맡았습니다.
한 아이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얘야, 거기서 무얼 하니?”
장군이 말을 걸었습니다.
“조그만 나라를 지키는 중입니다.”
“너 혼자서?”
장군은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몇몇 병사는 낄낄거렸습니다.
“나는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요.”
“뭐라고?”
아이는 대꾸 없이, 들고 있던 꽃가지로 머리 위를 가리켰습니다. 장군과 병사들의 눈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습니다. 거기에는 솥뚜껑만 한 벌집이 달려 있었습니다. 수많은 벌들이 윙윙거렸습니다.
“내가 이 벌들에게 명령만 내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실래요?”
아이가 벌집을 건드리는 시늉을 하자, 병사들은 두 팔로 머리와 얼굴을 함께 싸잡아 감싸며 쩔쩔맸습니다. 장군은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나라를 해치러 오지 않았어. 정말이야.”
“알아요. 꽃향기를 맡으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거든요.”
장군은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귀뿌리까지 빨갛게 달아 말을 더듬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임금님을 만날 수 있을까?”
“모두들 꽃향기를 세 번씩 더 들이켜셔요.”
장군과 병사들은 아이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습니다.
“됐어요. 이젠 이리 오셔요.”
아이는 펄쩍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장군이 뚜벅뚜벅 따라갔습니다.
병사들도 쭈르르 뒤따랐습니다.
성문은 찔레 덤불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찔레꽃망울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성문 바로 안에 큰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따라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젊은이가 힘차게 풀무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름한 숯불이 확확 피어날 때마다 젊은이의 얼굴이 불그레하게 물들었습니다. 아궁이 속에는 발갛게 단 시우쇠가 그들먹하였습니다.
“어서들 오시오.”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하던 대장장이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장군과 병사들은 대장장이의 웃음 띤 얼굴을 보고 적이 마음을 놓았습니다.
“이젠 그만 칼을 풀어 놓으시지요.”
아이가 말했습니다. 병사들은 장군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장군이 먼저 가슴에 품었던 칼을 끌러 아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병사들도 허리춤에 숨겼던 칼을 풀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장군도 아니고 병사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칼을 하나씩 하나씩 아궁이 속으로 던졌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더욱 신나게 풀무질을 계속하였습니다. 칼이 벌겋게 달았습니다.
대장장이는 먼저 단 칼부터 끄집어내었습니다.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였습니다. 잇달아 두드리자 칼이 호미로 바뀌었습니다. 호미가 다 되자 물이 든 돌항아리 속에 집어넣어 식혔습니다.
“이것을 가져야 조그만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오.”
“칼을 차고는 못 들어가나요?”
“조그만 나라에는 칼이 쓸모가 없으니까요.”
장군과 병사들은 호미를 하나씩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파란 잔디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장군과 병사들은 궁궐의 넓은 뜰로 안내되었습니다. 임금님이 나와 조그만 나라를 찾아온 것을 환영할 모양이었습니다.
그때 뎅그렁뎅그렁 종이 울렸습니다.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한결같이 근심을 모르는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염탐꾼으로 떠났던 두 병사와 참모장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옛날 함께 전쟁터를 누볐던 장군과 병사들을 보자, 당장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흙 묻은 손으로 장군의 손을 덥석덥석 잡았습니다. 병사들의 손도 덥석덥석 잡았습니다. 장군과 병사들은 흙 묻은 손이 참 포근하다고 느꼈습니다.
잠시 뒤, 임금님이 나오는 것을 알렸습니다. 장군과 병사들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 많았소. 여러분들의 밭에 뿌릴 씨앗을 나누어 주겠소.”
임금님은 씨앗 자루를 하나씩 안겨 주었습니다.
씨앗을 받아 든 장군과 병사들은 정말 조그만 나라의 백성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장군이 먼저 고개를 들었습니다.
병사들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니!”
모두들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임금님은 다름 아닌 대장간 주인이었습니다. 칼로 호미를 만들어 준 바로 그 대장장이였습니다.
<꽃으로 성을 쌓은 나라>, ≪김병규 동화선집≫, 김병규 지음, 박상재 해설, 23~37쪽
삽화 없는 동화책입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자기만의 동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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