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의사
강명신 ․ 김백일 ․ 김혜영 ․ 김희진 ․ 박용덕 ․ 박호원 ․ 이주연 ․ 조영수가 옮긴 피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의 ≪치과 의사(Le Chirurgien Dentiste)≫
피에르 포샤르, 인류 최초의 치과 의사
열다섯 살에 구강 질병에 정통한 외과 의사 포틀르레의 견습생이 되었다. 3년 뒤 구강 분야를 전문으로 개업했다. 널리 명성을 얻고 마흔 즈음에 파리로 진출했다. 파리의 의사들은 심각해지면 그를 찾았다. 모두들 만족했다. 치과 의사라는 직업의 탄생기다.
시술 부위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일으키거나 낮추기도 하고 몸이나 머리를 숙이기도 하며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기구를 들고 있는 팔, 손목, 손을 올리거나 내리고 입안에 넣었다가 꺼내고 앞으로 갔다가 뒤로 당기고 또 손가락을 동시에 구부리거나 펴고 기구를 따라 미끄러지는 등 온갖 자세와 동작을 동원해 치아, 잇몸 또는 우식 주변의 이물질을 자르고 깎고 긁어내고 빼낸다.
≪치과 의사≫, 피에르 포샤르 지음, 조영수 외 옮김, 127쪽
누가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가?
치과 의사의 시술 모습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이런 일을 한다.
의사라기보다 장인(匠人)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렇다. 치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되지 않은 과거에는 더욱 그런 모습이었다. 바로, 치과 의사의 역사적 기원 때문이다.
치과의사는 언제부터 장인이 아니라 의사가 되었나?
미국의 영향을 받아 치과가 의학과 별개 영역으로 제도화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치과는 외과의 한 전문 분야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외과 의사(surgeon)와 내과 의사(physician)는 기원이 다른 별개의 직종이었다. 내과 의사는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고, 외과 의사는 길드 조직에서 도제식 훈련을 통해 양성되는 장인이었다. 때문에 두 집단은 사회적 지위에서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 치과 의사는 수입 좋은 엘리트 아닌가?
18세기에 접어들어 외과 의사들은 이발사 출신의 외과 치료자들과 자신을 구별하며 보다 우월한 전문직으로 변모했다. 외과 의사의 지위는 점차 높아졌고, 별도의 학술원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피에르 포샤르는 바로 이 시기에 외과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치과를 전문 영역으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원제 ‘Chirurgien Dentiste’도 그런 외과적 기원을 반영하는가?
‘chirurgien’은 외과 의사를 뜻한다. ‘chirurgien dentiste’는 포샤르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치과 의사를 일컫는 공식 명칭이다.
포샤르는 외과 의사였는가?
외과 의사의 제자였다. 열다섯 살에 구강 질병에 정통한 외과 의사 알렉상드르 포틀르레(Alexandre Poteleret)의 견습생이 되었다. 3년 뒤 프랑스 서부 앙제에서 구강 분야를 전문으로 개업했다. 낭트, 렌, 투르에 출장 가 시술했다. 널리 명성을 얻은 마흔 즈음에는 파리로 진출했다.
그가 바로 인류 최초의 치과 의사인가?
치과 의사의 시원(始原)이다. 당시는 치아를 빼거나 잇몸을 청소하는 일이 발치사(拔齒士)나 떠돌이 약장수의 영역이었던 시절이다.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외과학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분야가 신체 영역별로 세분되었다. 파리 의사들은 구강과 치아 질병이 심각하거나 잘 낫지 않으면 대개 포샤르에게 의뢰했다. 결과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책에 실린 수많은 사례들은 정말 포샤르의 직접 경험인가?
포샤르는 당대의 해부학과 외과학 지식, 그리고 풍부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치아와 구강의 구조, 질병, 치료법, 특이 사례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자신이 직접 개발한 기구의 도판까지 첨부해서 784쪽에 달하는 원고를 완성했다.
책 뒤에 승인서가 붙어 있다. 누가 보낸 글인가?
포샤르는 원고 완성 후 5년 동안 파리의 저명한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들의 추천과 승인을 받아 1728년 책의 초판을 발간했다. 원고를 읽고 승인서를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왕립과학아카데미, 파리대학 의학부, 생콤 외과의학교 등에 적을 둔 당시 의학계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이 책은 출간 당시에도 학계의 인정을 받은 저서였는가?
그렇다. 초판이 발간된 지 5년 뒤 베를린에서 독일어 번역판이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동일한 제호의 저술이 10여 종 발간되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치아와 구강의 질병을 다룬 저서들이 뒤를 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는 한동안 잊혀진 책이 되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포샤르가 죽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저자에 대한 기록이 망실되고 명성도 잊혔기 때문이다. 그 뒤로 오랫동안 제대로 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포샤르가 이 책의 실제 저자가 아니라는 논란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19세기 들어 일각에서 포샤르가 실제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한 사람의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방대한 양으로 미루어 볼 때 여러 사람의 공동 집필이라는 것이다. 드보(De Vaux)라는 외과 의사가 대부분을 썼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1920~1930년대에 이 책이 세상의 눈길을 다시 끌어당긴 이유는 무엇인가?
유럽과 미국 치과 의사들이 자신의 직업을 전문직으로 확립하려고 애쓰던 20세기 초에 와서야 포샤르와 이 책이 재발견되었다. 1922년과 1923년 파리와 뉴욕에서 열린 포샤르 저서 탈고 200주년 축전에 모인 치과계 인사들은 그를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로 추대하고 치과 의사 전문직의 원조로 삼았다. 그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취지로 1936년에 창립된 피에르 포샤르 아카데미(PFA)는 80개국 넘는 나라의 치과 의사들이 가입한 국제 조직으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치과 의사와 대중에게 이 책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치과 의사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답을 준다. 치과 의사의 기원을 밝혀 주는 의미 깊은 책이다. 그동안 국내 의학 고전의 출간 현황을 짚어 보면 몇 권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중에서도 치의학 고전의 출간은 전무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국내 치의학계도 한국어로 된 치의학 고전을 갖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조영수다. 치과 의사다. 대한치과의사(史)학회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