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섭 동화선집 초판본
김은숙이 엮은 ≪김요섭 동화선집≫
꽃은 불이다
꽃은 손을 대도 데지 않는 불이고 이슬 한 방울에도 놀라는 불이지만 태양도 꺼트리지 못하는, 별빛의 씨가 땅 위에서 눈을 뜬 강인하고 영원한 불이다.
기관차의 굴뚝에서는 쟈스민의 향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향기가 연기 대신 푹푹거리고 토해졌읍니다.
그 까닭은 이 기관차가 끌고 가는 화물이 꽃짐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렇기도 하지만 화부가 퍼부어 넣고 있는 것은 석탄이 아닙니다. 꽃다발이든가 꽃나무 뿌리가 화덕에서 타올랐읍니다.
기적 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퍼졌읍니다. 그 소리는 구름 떼 같은 종달새들의 울음소리였읍니다.
이윽고 기관차는 장미 꽃잎을 함빡 뒤집어쓴 채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국경 지대를 넘어섰읍니다. 장미로 우거진 국경 지대를 다 넘어섰을 때는 화물 열차의 무쇠 바퀴마다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꽃향기가 마구 뿜어졌읍니다.
이 거인이 달려가는 곳은 이웃 나라 조그만 시골에 있는 향수 공장이었읍니다. 이 나라의 유일한 해외 수출품은 향수의 원료인 꽃잎이었읍니다.
진달래꽃이 산과 들에 불붙듯 핀 봄날, 옛날의 전쟁터에서 탄피를 주어 공책도 사고, 엿도 사 먹는 동방의 그 어느 나라의 어린이들이 있읍니다.
때로는 불발탄을 건드렸다가 폭음 소리와 함께 봄의 들에서 진달래빛 피를 흘리면서 대지에 쓰러집니다.
그 어린이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닙니까.
≪김요섭 동화선집≫, <꽃잎을 먹는 기관차>, 김요섭 지음, 김은숙 엮음, 80~81쪽
표기는 ≪꽃잎을 먹는 기관차≫(배영사, 1968)를 따랐습니다.
무쇠와 꽃잎의 대비가 강렬하다. 감동 기법인가?
무쇠 기차를 움직이는 힘은 꽃잎과 꽃향기다. 절묘한 은유가 이미지 혁명을 일으킨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자, 주권마저 상실한 국민, 전쟁이 양산한 실향민, 고통과 절망이다. 이로부터 탈출하는 꿈을 그려낸다. 진정한 승자는 강철이 아니다. 강철을 움직이는 선한 의지다. 역전의 판타지가 감동을 일으킨다.
김요섭은 독자의 의식에 어떤 방법으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가?
강함으로 약함에 힘을 실어 주고 약함으로 강함을 무위화한다. “쇠가시에 앉은 나비”, “쇠가시에 얽혀 핀 개나리”와 같이 상충하는 단어는 굳건한 의미의 결속으로 전쟁의 슬픔을 위로한다. “따뜻한 눈[雪]”, “무지개 밧줄” 같은 반어 표현으로 사물은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의미를 얻는다.
그의 문학을 세우는 중심 기둥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고향이다. 잃어버린 자유이기도 하다. 유년의 고향만이 아니라 인류가 떠나온 근원의 고향, 우주 저편의 신화 공간까지 확대한다.
주제를 드러내는 환상의 질료는 무엇인가?
북국의 바람, 별, 찬 공기, 자작나무 숲, 장작불, 이슬, 꽃, 고향의 자연 환경 요소다. 그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다. 갖가지 모양과 세기의 바람이 활시위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소리친다. 피난지의 나뭇가지에 걸어 둔 칠판을 퉁탕퉁탕 치며 희망의 날을 깨운다. 몰아치는 소리가 전쟁의 상흔을 상기시키며 평화를 꿈꾸게 한다. 갖가지 색의 옷도 입는다. 노랑 바람은 나비를 춤추게 하고, 파랑 바람은 새를 부르고, 분홍 바람은 꽃을 피운다.
환상은 그의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현실의 갖가지 부조리와 부당함을 뛰어넘어 소망을 안겨 준다. <안개와 가스등>에서 작가는 가스등을 켜는 할아버지를 앞세워 지상에 별을 선사한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밤 별의 메신저가 되어 지구에 희망을 선물한다.
환상은 흔히 현실 도피의 피난처로 이용된다. 그도 그런가?
그의 판타지는 사회·역사적인 시점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역사의식은 가까이는 전쟁, 멀리는 민족 신화로부터 발원한다. 인간의 원형적 심성을 상상력의 힘으로 치유한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꿈과 상상력이 동인이 되지만 일단 판타지가 하나의 입체적인 세계로 가시화하면 현실에 변화를 주는 효용성을 얻는다. <판타지와 현실>이란 글에서 말했듯이 김요섭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은 유예되어 있지만 언젠가 전개될 새로운 현실로서의 판타지 공간을 작품마다 마련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이 바로 김요섭인가?
1975년 ≪어른을 위한 동화집≫을 냈다. 그는 동화를 쓸 때 한 번도 독자의 나이를 겨냥해 쓴 적이 없다고 어느 책의 머리말에 밝혔다. 작품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동화적 발상과 시적 이미지가 날줄과 씨줄처럼 짜여 있다. 교차된 이미지의 그물망에 김요섭은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을 묘사하고 철학적 사유와 유년의 순수를 색칠했다. 작품을 읽은 어린이는 작가가 구축한 판타지의 성안에서 색색의 이미지로 마음을 치장할 수 있고, 어른들은 강파르고 메마른 영혼에 유년의 풍요로운 감성을 되찾아 줄 수 있다.
‘요섭’이란 이름을 얻은 사유는 무엇인가?
1927년 함경도 나남에서 김두한의 늦둥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을 얻고 싶어 아버지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후 태어난 연유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한다.
수상한 그 시절 유년기에 그는 무엇을 했나?
늦도록 엄마 젖을 먹으면서 엄마 등에 업혀 시집간 누나네 집에 놀러 다녔다. 유치원 가는 길에 사이다 공장에서 나온 병뚜껑을 훈장처럼 가슴에 매달고 우쭐거리기도 했다. 일본군 나팔수들을 무턱대고 따라가며 신나하고 다른 유치원 아이들과 돌팔매질을 하며 싸움을 놀이로 삼기도 했다. 유치원에서는 율동에 맞춰 동요를 많이 불렀다. 그러한 연유로 동요를 즐겨 썼고, 동요의 리듬감이 시에 접목되어 운율의 정감을 더했다.
만 열네 살에 등단한 것은 풍요로운 유년의 결과인가?
일찍이 문학소년의 자질을 드러냈다. 동화구연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고 동극에 출연했다. 잡지 ≪아이생활≫에 실린 시를 보며 시인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1941년, 열네 살에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고개 너머 선생>이 입선되며 등단했다. 그 후 1947년 ≪소학생≫ 지에 <연>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현대적 서사 구조 안에 환상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내장한 <늙은 나무의 노래>를 발표했다.
해방 정국에 그의 동선은 어떤 궤적을 그리는가?
1945년 8월 9일 한밤중에 소집장을 받고 군대에 들어갔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던 날, 일본군 일원이 되어 총을 잡는다. 그리고 며칠 뒤 해방을 맞는다. 해방 정국은 해방 전보다 더 어수선했다. 이웃 나라의 이념을 거름 없이 끌어안은 후폭풍에 동족끼리 증오와 배반의 날을 세웠다. 그 무렵 청진 교원대학에 들어가 시와 동화를 중심으로 동인 활동을 시작하지만 곧 월남을 감행한다.
남으로 내려온 이유는 무엇인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염원이었다. 해방 정국의 혼란, 혁명의 기치 아래 자행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목도하면서 혁명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인간 본연의 의식을 깨우치는, 진정한 자유를 천착하고자 했다. 그 모든 열정과 염원을 담아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서울을 지목했다. 서울은 어린 시절 소년잡지를 받아 보면서 꿈을 키우는 연료를 공급받던 곳이다.
월남 이후 그의 문학 활동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소학생≫ 등 잡지에 동화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노총신문≫에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라는 평론을 발표하고 ≪영남일보≫ 문화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문학이었다.
왕성한 문단 활동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1967년 40세가 되는 해, 한국시인협회 한국 신시 60년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월간문학≫ 편집위원 등 복수의 직책을 맡아 작가로서의 지평을 넓혀 간다. 1971년 44세 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에 선출되고, 1972년에는 일본펜클럽 주최 일본문화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이듬해엔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선출된다. 1977년 문협 이사장 직무 대행, 1979년 제4차 세계시인대회 사무총장을 끝으로 공적 직함을 마감한다. 199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면서 문학 인생을 보상받는 절정을 맞는다.
이렇게 바쁜 사람이 문학을 할 수 있는가?
시집 16권과 동화집 20여 권을 비롯해 번역서, 평론집, 자전적 수필집을 냈다. 작가는 작품을 쓰기 위해 불가피하게 자기 안에 갇혀 지내기 쉽다. 하지만 그는 문학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생각으로 문단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잡지도 창간했다. 계간 ≪아동문학사상≫은 어떤 잡지인가?
순수 아동문학 이론을 주도하는 잡지였다. ≪아동문학사상≫을 통해 김요섭은 아동문학이 결코 너도나도 쓸 수 있는 문학이 아님을 천명했다. 국내외 유수한 작가와 문학 이론가의 글을 실어 엄정한 검증을 받도록 유도했다. 가히 선구자적 발상이고 실천이라 하겠다.
10호 만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러고 끝이었나?
1974년 11월, 10호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2004년에 여러 후배들이 복간했다. 복간 첫 호는 김요섭 특집으로 꾸몄다. 지금은 연간 출간된다. 그 후로는 생전 창간인의 기획 의도를 따라 매해 아동문학 연구자, 작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키워드를 정해 잡지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올해로 10회째, 그러니까 통산 20회째다. 올해 키워드는 ‘동화, 시대를 말하다’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아동문학 작품이 어떻게 시대를 말하는가, 어린 영혼들의 눈을 통해 솔직하고 담대하게 시대를 조명하고자 했다.
그의 시비에 새긴 <꽃>의 장렬한 이미지는 김요섭의 영혼이라 할 만한가?
1997년 타계 후 2001년 4월 선후배 문인들이 마음을 모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만남의 장소에 김요섭 시비를 건립했다. 문학비에 새겨진 시 <꽃>에서 시인의 꽃은 ‘손을 대도 데지 않는 불’이고 ‘이슬 한 방울에도 놀라는 불’이지만 ‘태양도 꺼트리지 못하는, 별빛의 씨가 땅 위에서 눈을 뜬 강인하고 영원한 불’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김은숙이다. ≪아동문학사상≫의 발행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