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계사전
정진배가 옮긴 <<주역 계사전(周易 繫辭傳)>>
하늘과 땅과 인간의 길
하늘의 길을 어둠과 밝음, 땅의 길을 굳셈과 무름, 사람의 길을 어짊과 바름이라 하지만 사람은 위로 하늘, 아래로 땅과 함께 하므로 하늘과 땅과 인간의 길은 하나다.
역은 천지의 원리와 부합하여 능히 하늘과 땅의 도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우러러서는 하늘의 무늬를 관찰하고 구부려서는 땅의 이치를 살핀다.
≪주역 계사전≫ 작자 미상, 정진배 옮김, 17쪽
주역은 2014년을 어떤 해로 보는가?
‘나’와 분리된 순수 객관 실체로서의 2014년이 존재할지 모르겠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길은 사람이 걸어 다녀서 길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산하대지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일체가 자연이다. 하나를 ‘하나’로 호명하는 순간 하나는 둘로 벌어진다. 순수일자는 ‘하나’가 사라진 자리이다.
주역에 주관성과 객관성의 분별이 있는가?
주역 계사전에 ‘적연부동․감이수통(寂然不動․感而遂通)’이란 구절이 나온다. ‘고요히 움직이지 않고 홀로 놓인’ 산가지가 내 마음의 간절함에 ‘응’해서 천하의 연고에 통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나’라는 아상이 있을 때 주관과 객관이 나뉘지만, 심재(心齋)하는 순간 천지만물은 일체가 된다.
주역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무엇인가?
내 속에 하늘이 있고, 하늘 속에 내가 있다. 단지 내 머리 위에 아득히 펼쳐진 ‘허공’이 아니다.
하늘과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인간을 영(靈)과 육(肉)으로 나눈다면 영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인간이 죽으면 영은 하늘로, 육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말해 왔다. 그렇게 보자면 내 속에 하늘과 땅이 모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천지인의 도는 모두 대등한가?
하늘의 도를 음양(陰陽)으로, 땅의 도를 강유(剛柔)로, 사람의 도를 인의(仁義)로 규정한다 할지라도, 천도(天道)와 지도(地道)와 인도(人道)는 이름의 차이일 뿐이다. 근본 원리는 동일하다.
점을 치는 것도 하늘과 내가 통하는 행위인가?
마음의 사사로움을 없앤 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인간의 언어로 푼 것이 점이다.
주역이 말하는 우주의 원리는 뭔가?
‘낳고 또 낳는[生生]’ 것으로 표현한다.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가?
주역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를 말한다. 천지창조와 같은 시간 좌표상의 시작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시작과 끝은 인간의 분별이 만든 허구다.
주역의 끝은 무엇인가?
64괘의 마지막 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다.
화수미제가 무슨 뜻인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 이다.
주역의 시작은 어디인가?
끝이 새로운 시작이다. 시종(始終)이 아닌 종시(終始)를, 생사(生死)가 아닌 사생(死生)의 이치를 드러낸다.
<계사전>이란 무엇인가?
‘계사(繫辭)’는 ‘말을 매단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주역≫의 괘사와 효사를 총괄해 해설한 글이다.
‘괘(卦)’와 ‘효(爻)’는 무엇인가?
효는 시시각각의 변화를, 괘는 사물의 총체적 형상을 표현한다. 하나의 대성괘는 여섯 효로 이뤄지고 여섯 효는 다시 하나의 대성괘를 구성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어떤 원리인가?
‘홍길동’이란 인물의 일생을 여섯 단계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여섯 단계가 모여서 홍길동의 삶을 구성한다. 이런 원리다.
주역으로 홍길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나?
과거-현재-미래는 우리의 분별적 사유가 임의로 시간 좌표 상에 선을 그은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로 모습을 드러내었고, 현재는 미래의 나의 상이다.
미래를 조정할 수 있는가?
한자의 ‘예(豫)’는 파자(破字)하면 나(予)의 상(象)이다. 지금-여기 떠오르는 현전 일념을 다스리면 미래도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
괘와 효는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64괘와 384효 모두가 태극이 분화한 모습이다.
상전과 하전으로 나누는 이유는 뭔가?
중국의 전통적인 체용(體用) 사유 때문이다. <계사상전>은 형이상적이고 본체론적 내용을 주로 담고 있어 체(體)다. <계사하전>은 형이하적이며 인사적인 내용을 많이 포괄해 용(用)이다.
당신이 <계사전>을 성경과 비교한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들이 동·서와 고·금을 회통(會通)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기 바랐다.
비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원의를 훼손하거나 왜곡할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가치관의 대혼란기에 ‘다름’ 속의 ‘같음’을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동서양의 세계 인식은 어떻게 다른가?
동양은 주역에서 보듯 순환론 사유가 지배적이다. 서양은 적어도 근대 이후에 직선론 세계관이 풍미해 왔다.
서양의 직선론 세계관은 어디서 볼 수 있나?
마르크스의 역사관이다. 목적론(teleology)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 기독교의 시간관이다.
순환론이 직선론과 만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순환론의 시간관에서 어느 한 시점을 전체와 분리해서 보면, 거기에는 필경 직선론의 요소가 내재해 있다. 하루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지만, 하루 속의 24시간은 시작에서 끝으로 나아가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주역으로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알 수 있나?
바닷물이 무한정이라도 사람은 자기 그릇만큼만 물을 담을 수 있다. 주역에서 무엇을 보느냐도 독자의 정신적 경계에 달려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정진배다.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