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의 여자 나혜석
지만지한국희곡선집출간특집 9. 활자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유진월의 ≪불꽃의 여자 나혜석≫
연극이 시작된다
책 속에 누워 있던 활자가 일어서 걷기 시작한다. 1948년에 사라진 나혜석의 목소리가 들리고 예술혼이 무대를 태운다. 배우는 숨 쉬고 관객은 놀라고 연극은 텅 빈 공간을 꽉 채운다.
경석 처: 여기서 잘 지내요. 밥 잘 먹고. 행여 오라버니들 이름이나 전 남편 이름은 꺼내지도 말아요. 지난번처럼 또 어디 딴 데 간단 소린 아예 말구 그냥 여기 있어요. 나가 봐야 또 어딜 가겠어요.
혜석: 저….
경석 처: 인제 여기서 다시 나갔다간 진짜 죽어요. 돈은 좀 맡겨 놓고 갈 테니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저이들한테 말하구.
혜석: 저…우, 우리… 애….
경석 처: (귀를 기울여 듣고) 뭐? 애들? 애들은 걱정 말아요. 애들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우? 잊어버려요. 그저 잘되라고 기도나 해요.
혜석: 나… 나… 파… 파….
경석 처: 파리가 무슨 파리예요, 좁은 조선 땅에서도 못 움직이는 판국에. 파리에서 누가 기다려 준답디까. 제발 꿈속에서 헤매는 소릴랑 그만둬요. 나 이제 가야 돼요. 차 시간 늦겠어요.
경석 처 나가고 혜석은 점점 무표정에 얼굴을 씰룩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는 동안 손을 떨고 있다.
제 손이 아닌 듯 그저 매달려서 흔들리고 있는 손.
혜석: 파리로… 가야 돼. 파리로…. 살러 가… 아니라… 주, 죽… 으… 러.
≪불꽃의 여자 나혜석≫, 유진월 지음, 73∼74쪽
병원, 아니면 수용소인가?
나혜석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떤 마지막이었나?
1948년 12월 10일 용산 시립병원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한 할머니가 죽었다. 지켜보는 이도, 시신을 거둘 이도 없었던 그녀의 이름은 최고근이었다.
최고근 얘기는 왜 하는가?
뒤늦게 확인되었다. 그녀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이었던 것이.
당신이 이 희곡에서 이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안일한 생에 안주하지 않고 끝까지 이상 세계를 향해 떠나려 했던 그의 가치관을 보여 준다. 나혜석다운 삶의 방식, 생의 결기가 집약된 장면이다.
나혜석다운 생이란 무엇인가?
그녀는 당대 톱이었다.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작가였으며 화가였다. 외교관이었던 김우영과 결혼해 한국 최초로 부부 동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여행 중에 만난 최린과 사랑에 빠졌고, 그 때문에 이혼했다. 이후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그녀를 작품에 불러 왔나?
당대 가장 화려한 삶을 살고도 종국에는 무연고자로 죽었다. 삶의 간극이 크고 극적인 요소가 넘치는 인물이다. 선각자로서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비극적인 요소를 기본으로 설정했다. 거기에 여성의 사랑과 이혼, 아이의 죽음과 세상의 멸시 등, 보통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 요소를 배합했다.
연극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초연 당시 나혜석의 부활을 알리며 언론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관객은 여전히 그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관객이 공감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1930년대에 나혜석이 배척당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다.
불륜 때문이란 말인가?
그렇다. 최린과의 사랑이 유부녀의 일탈이라는 결점으로 부각되면서 예술적 업적이 가려졌다. 지금은 21세기인데도 말이다.
당신이 설정한 나혜석은 무엇이었나?
완고한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비참하게 몰락한 한 여성의 아픔에 집중했다. 산산조각으로 파멸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았던 그녀의 위대함을 작품에서 보여 주고자 했다.
왜 그녀를 당신 희곡의 주인공으로 세웠나?
한국 희곡사를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한국 희곡과 여성주의 비평>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그때 1930년대에 나혜석이 쓴 짧은 희곡 <파리의 그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작품에까지 가게 되었다.
한국 희곡사에서 여성주의는 어디쯤 있는가?
매우 제한적이다. 여성 작가가 극소수다. 1세대 여성 작가는 1960년대 박현숙, 김자림이다. 1970년대 등단해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정복근을 거쳐 1990년대 중반에 등단한 김명화, 장성희가 여성 작가군을 형성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희곡을 쓰는가?
한국사와 역사 인물에서 작품 소재를 취한다. 한국 현대사를 위안부, 기지촌 여성, 해외 입양과 연결해 재해석한다. 여성주의 시각을 중시한다.
희곡의 매력이 무엇인가?
누워 있던 활자가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공연을 통해 매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당신은 누구인가?
유진월이다. 한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