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연 동화선집
길지연이 짓고 최미선이 해설한 ≪길지연 동화선집≫
착한 아이만 있을까?
착한 인간만 있을까? 이건 거짓말이다. 동심은 인심이고 인심은 자연이고 사실이다. 천사와 악마 사이를 배회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아느냐, 모르느냐가 다를 뿐이다.
“할아버지는 바보가 분명해요. 우리들 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어린이 책을 써요?”
순간, 고 선생은 얼굴이 붉어졌다.
“너 그럼 내 책을 읽은 게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 잃은 고양이를 데려다 아기처럼 돌봐 주는 착한 소년, 그건 할아버지의 생각일 뿐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착하지만은 않아요. 침 뱉고 총알 쏘고 어른한테 욕도 하면서 논다고요.”
고 선생은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다. 도대체 무슨 재수 없는 날이란 말인가? 오늘같이 기쁜 날, 이상한 여자애가 나타나 약을 올리고 가더니 이제는 못돼 먹은 남자애랑 부딪쳐 이 나이에 말싸움을 해야 하다니! 고 선생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정말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할아버지야말로 무례해요. 앞으로 거짓말 책은 쓰지 마세요. 우리들은 예의 바르고 얌전하고 바르지만은 않다고요.”
<고병익 선생의 아이들>, ≪길지연 동화선집≫, 길지연 지음, 최미선 해설, 133쪽
낯선 장면이다. 무슨 일인가?
노년의 동화작가가 독자인 어린이와 싸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고병익 선생은 ‘어린이가 뽑은 동화작가상’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자신의 책을 읽었다는 어린이가 나타나 작가를 비난한다.
소년의 비난은 타당한가?
고 선생은 “그래, 내가 너희들을 잘 몰랐구나”라고 말한다.
고병익 선생은 누구인가?
일흔 살의 동화작가다. 한평생 글쟁이로 살았다. 맘에 드는 작품이 아직 없다.
소년은 누구인가?
길고양이에게 BB탄을 쏘는 개구쟁이다. 고 선생이 말리자 적반하장으로 대들면서 선생의 작품을 비판한다.
동심이 꼭 착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내세운 이유는 뭔가?
성장소설적 요소다. 어린이들의 머리가 굵어짐에 따라 기존 동화의 문제점도 지적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동심이 무너진 세계, 어른 세계의 ‘추악’과 ‘혐오’를 어린이 앞에 직접 드러낸다.
동심이 무너진 세계를 그리는 다른 작품도 있는가?
<열네 살, 그해 저녁>이다. 노래방 도우미를 하며 가정을 이끌어 가는 엄마와, ‘창문을 열 수도 없는 11평 오피스텔 방에서 엄마의 술 냄새와 터질 것 같은 더위’를 참고 사는 열네 살 소녀 수라 이야기다. 배경 설정부터가 ‘잔인’하다.
가장 심각한 작품은 뭔가?
자살을 다룬 작품이다. <판도라의 열쇠>가 그렇다. 신산스러운 어른의 세계를 관찰하는 소녀 나미 이야기다. ‘이웃집 언니’는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고 실의에 빠졌다. 스스로 세상을 등지려 시도했다가 응급실에 실려 간다.
끔찍한 이야기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
성장기의 소녀가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나미는 어른의 세계에 직접 개입해서 이해되지 않는 의문을 털어내 보려 하지만, 결국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신, 성장의 문턱에서 삶에 눈을 뜨고 어른들의 삶을 가슴으로 이해해 보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자랐는가?
초등학교 무렵, 어머니가 병환으로 요양원으로 들어가시고 아버지는 지방에 계셨기에 외가댁에서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손녀를 예뻐하셨지만 어머니의 부재로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증세가 심해져 담임선생님이 ‘자폐’로 판단하기까지 했다.
당신의 자폐를 어떻게 극복했나?
학교생활이 힘들었다. 외할머니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홈스쿨링’을 선택하셨다. 어느 대학생 언니가 개인교수로 붙었고, 그 언니의 수업 방식에 적응했다. 조금씩 타인과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검정고시로 18살에 대학 입시에 합격하고 몇 년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지냈나?
동경외국어전문대학과 청산학원여자대학을 거쳤다. 이 학교에는 당시 일본에서도 드문 아동문학 강좌가 있었다. 여기서 일본의 유명한 아동문학 평론가인 ‘시미즈 마사코’ 교수를 만났다.
시미즈 마사코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일본의 군국주의, 천황주의를 반대한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녀의 남편은 동경대 출신 환경학자인데 일본 정부의 비리를 비판하다가 옥고를 겪기도 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가?
일제강점기 역사를 소설로 써 시미즈 교수에게 제출했다. 일본어로 원고지 500매 분량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생체 실험을 당한 한국사람 이야기였다. 문장도 문체도 없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썼다.
어떤 반응이 돌아왔는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의 글을 읽고 며칠간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사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으로 조선 해주에 계셨습니다. 그때 나는 네 살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너무 잘 압니다. 죄송합니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사죄드립니다.”
동화를 쓰게 된 사연은 뭔가?
졸업 무렵 시미즈 교수는 내게 만년필 선물과 함께 편지를 건넸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동화작가가 되어 주세요. 한국의 아동문학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말을 잃고 소리를 잃었습니다.’
무엇으로 등단했는가?
동화 <통일 모자>로 1994년 ≪문화일보≫ 하계문예에 당선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분단의 경계선을 보며 이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
최근 관심은 뭔가?
‘생명 존엄’, ‘공존’, ‘동물 권리’다.
관심은 어떤 식으로 당신의 문학이 되는가?
<예니를 찾아라!>를 보라. 고양이를 함부로 버렸다가 후회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인간’만이 최고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고 존중해 주는 그런 문학세계를 가꾸어 간다.
당신은 누구인가?
길지연이다. 동화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