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불교 유신론
4월의 신간. 식민지의 근대와 불교의 근대
조명제가 옮긴 한용운(韓龍雲)의 <<조선 불교 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도덕과 문명의 원료
높은 철학이 사상이 되고 사상이 종교가 되려면 행동이 필요하다. 높은 행동은 자신을 버리고 낮은 행동은 자신을 구한다. 조선 불교는 자신을 버려야 했다.
문명의 정도가 날로 향상되면 종교와 철학이 점차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것이며, 그때에는 그릇된 견해나 신앙과 같은 것이 어찌 다시 눈에 띄겠는가? 종교이면서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과 문명의 원료다.
≪조선 불교 유신론≫, 한용운 지음, 조명제 옮김, 24쪽
한용운이 이 책을 쓸 때 조선 불교는 사정이 어떠했나?
전통의 틀에 안주했다. 사회적, 사상적 기능이 약했다. 조선 왕조 내내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인 사회체제가 유지되며 불교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어떤 수준이었나?
새로운 사상 체계를 제시하지도 못했고 승려의 질은 하락해 정체되었다.
그의 불교 개혁 전략은 무엇인가?
서구 근대의 문명론에 입각해 불교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불교가 서구 근대 문명과 어울릴 수 있다고 본 것인가?
그는 불교가 종교적, 철학적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가 표방하는 평등과 구세의 이념은 문명의 시대에 적합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어떤 개혁을 주장했는가?
염불당을 폐지하자는 주장, 소회(塑繪)를 철폐하자는 방안, 각종 의식을 간소화하자는 내용, 사원의 경제 활동 권장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교육과 참선에 대한 이해, 사원의 위치 선택, 승려의 결혼 문제도 이야기했다.
염불당, 소회, 의식 폐지의 이유는 뭔가?
그것이 미개한 종교에서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미신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의 연장선을 잘라 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명론의 시각에서 전통 불교의 유산을 부정한다.
경제 활동과 교육을 권장은 문명 지향인가?
문명에 적합한 종교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한 개혁안이다. 서구 근대 문명론을 의식한 근대화 노선이다.
근대화 노선은 맞는 것인가?
서구 중심의 근대 문명론은 기본적으로 비서구 사회에 대한 편견,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욱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는 공통적으로 전통과 단절된 형태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왜 서구 문명론의 입장에 섰는가?
일본의 근대 문명을 직간접으로 체험했다. 그가 내세운 구체적인 개혁안과 모델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량치차오의 영향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겉으로 보면 그렇다. 한용운은 야만−문명이라는 구도에서 개혁을 주장했다. 량치차오는 그보다 앞선 1899년 발표한 ≪자유서≫에서 인류가 문명의 3단계, 곧 야만−반개(半開)−문명의 순서를 밟고 상승한다고 보았다.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량치차오의 언설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량치차오가 수용한 문명론의 바탕에 메이지 일본의 사상이 깔려 있다.
일본의 사상이란 뭘 말하는 것인가?
후쿠자와 유키치다. 1875년 ≪문명론지개략≫에서 문명의 단계론을 제시했다.
메이지 일본, 량치차오, 한용운이 하나의 사상 위에 서있는가?
사상 연쇄다. 한용운에 대한 평가 문제가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승려 한용운은 어떤 사람인가?
불교계의 개혁과 근대화를 위한 이론을 제시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실천에 힘썼다. ≪조선 불교 유신론≫ 외에 ≪불교대전≫, ≪십현담주해≫ 등을 저술했다. 또한 잡지 ≪불교≫의 편집인,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근대 불교의 형성과 확산에 기여했다.
그의 불교 저술이 낯선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 이후 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다. 1950년대에 이른바 비구·대처 분쟁이 일어나면서 불교계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고 인적, 물적 토대가 붕괴되었다.
비구·대처 분쟁이 무엇인가?
결혼을 하지 않는 승려인 비구승 중심의 조계종이 등장해 다수였던 교단 승려들을 대처승이라는 명분으로 비판, 공격했다.
한용운은 대처승이었나?
아내를 둔 적이 있는 대처승이다. 게다가 특정 문중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불교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문인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는 무엇인가?
1970년대 ≪창작과 비평≫에서 그를 민족시인으로 부각시켰다. 백낙청이 한용운을 마지막 전통시인이자 최초의 근대시인으로, 그리고 최대의 시민시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창비가 왜 그를 집어 올린 것인가?
분단과 전쟁 때문에 식민지 시기를 대표하던 문인들이나 진보 지식인들이 대부분 월북하거나 죽었다. 문학계는 젊은 우파가 지배하던 때였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제에 저항한 한용운이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로 선정된 것이다.
그가 승려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1980년대다. 민주화 운동이 전 사회로 확산되면서 불교계에서도 민중불교론이 제기되었다. 인문학 전반에 불교의 학문적 시민권이 확산되었다.
그 후 한용운 연구의 사정은 어떤가?
1990년대 이후 근대 불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한용운에 대한 연구가 불교학, 불교사학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근래에는 종교학, 철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그를 조망한다.
한용운 연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민족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문학사적 연구가 9할이다. 근대 불교와 관련된 연구도 민족불교론 분야의 성과가 대부분이다. 최근 연구도 여전히 일국사적이다. 그의 불교 근대화론은 동아시아의 근대 사상사라는 범주에서 접근하고 이해할 가치가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조명제다.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