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단편집 초판본
이정선이 엮은 ≪초판본 조명희 단편집≫
조선 식민의 수순
동척은 땅을 뺏어 일인을 식민한다. 조선 사람의 하향이 시작된다. 중농은 소농으로, 소농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땅을 떠나 도회로, 일본으로 떠나간다. 그곳에는 무산자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사가 누구인가?
백정의 딸이다. 부모는 그녀를 발천시켜 볼 양으로 서울로 보내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시켰다. 고향에서 사회운동을 함께하던 연인이 죽자 고국을 떠난다.
그 연인이 바로 ‘도라간 애인’인가?
그렇다. 박성운이다.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숨을 거두었다.
투옥의 사유는 무엇인가?
낙동강 기슭에 수만 평의 갈대밭이 있었다. 이것이 일제 당국에 넘어가게 되자 주민들 편에서 싸우다 선동자로 몰려 경찰에 붙들렸다.
사망 원인은 무엇인가?
평소 경찰의 미움을 받아온 터라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 때문에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논도 밭도 아니고 갈대밭 때문인가?
낙동강이 흐르고 마을이 생긴 뒤부터 갈대밭은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이었다. 갈대를 베어 자리를 치고, 갈대를 틀어 삿갓을 만들고, 갈대를 팔아서 옷을 구하고 밥을 구했다.
일제에 넘어간 사연은 무엇인가?
촌민의 무지 때문이었다. 십 년 전에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가 일본 사람 ‘가등’이란 자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가을부터는 갈대도 벨 수가 없게 되었다.
주민들은 대책을 찾았는가?
도 당국에 몇 번이나 사정도 해 보고, 촌민끼리 손가락을 끊어 혈서 동맹까지 조직해 항거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집단행동을 벌인 것인가?
촌민들이 분김에 눈이 뒤집혀 덮어놓고 갈대를 베어 가면서 저편 수직원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 끝에 성운이 잡혀간 것이다.
성운도 이곳 출신인가?
그렇다.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이었다. 부친이 없는 살림에도 아들을 가르쳐 놓았고, 그 덕분에 군청 농업 조수로도 일했다. 그러다 하던 일을 관두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서간도, 남북 만주, 북경, 상해 등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에 힘쓰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 고향은 어떤 모습이었나?
다섯 해 전 떠날 때만 해도 백여 호 대촌이던 마을이 그동안에 인가가 엄청나게 줄었다. 예전에 중농이던 사람은 소농으로, 소농이던 사람은 소작농으로 떨어졌다. 소작동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도회로, 서북간도로, 일본으로 흩어졌다.
고향에서 그는 뭘 했는가?
농촌 야학을 열어 농민 교양에 힘썼다. 다음에는 소작조합을 만들어 지주, 특히 대지주인 동척(東拓)의 횡포와 착취에 대항했다. 브나로드 운동이다.
브나로드의 성과가 있었나?
실패했다. 소작조합은 해산 명령을 받았고 야학도 금지되었다. 동척과 관청의 횡포와 압박도 심해졌다. 그러자 어떤 이는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를 안고 마을을 떠나기도 했다.
성운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죽어도 이 땅 사람들과 같이 죽어야 할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명희의 주장인가?
조명희는 박성운이라는 인물에 자신의 관념을 투영했다. 그를 통해 더 나은 생활을 찾으려고 만주, 일본 등지로 떠날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은 조명희의 대표작인가?
경향파 문학은 과열된 이념이나 경제 투쟁 일변도였다.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조명희는 고향을 떠나는 ‘로사’를 두고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라며 희망적인 여운을 남기며 재래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런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1927년 이후 조명희의 행적은?
1928년 여름, 가족을 이끌고 성공회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얼마 뒤 모친에게만 하직 인사를 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춘다.
어디로 간 것인가?
소련으로 망명했다.
소련에서는 어떻게 살았나?
연해주 신한촌의 중학교와 우수리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에는 황명희와 재혼했다. 이후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 문학을 가르쳤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이 된 뒤로는 단편소설은 물론 시, 동요, 희곡, 장편소설 등에 걸쳐 폭넓은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 첩자로 몰려 1938년 5월 11일 총살당했다. 45세였다.
총살 이후 소련과학원에서 ≪조명희 선집≫이 간행된 사연은 무엇인가?
1956년 소련 정부는 조명희에 대한 과거 잘못된 결정을 파기하고 그를 복권시켰다. 이듬해에 한글판 ≪조명희 선집≫이 간행되었다. 1988년에는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소재 국립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열렸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정선이다. 경희대학교에 출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