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백신애 단편집
지식을만드는지식과 겨울여행 12. 1927년 시베리아의 겨울
산산히 부서진 영혼이여
초복이 지난 여름의 한복판에서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극동 러시아. 그때 그곳은 땅을 찾아 왔다가 길을 잃은 조선인들, 곧 꺼래이들의 겨울이었다. 안내자의 이름은 백신애, 그가 만난 순이네 일가는 아비의 유골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시베리아의 바람은 산 사람마저 기억의 나라로 유배한다. 역사는 계절을 망각했고 끝나지 않는 겨울의 나날은 식민지 조선의 뼛속까지 스며든다. 겨울은 언제나 기억으로 돌아가는 계절이었다.
고국을 떠날 때는 겹저고리에 홋속옷을 입고 왔었음으로 아직까지 그때 그 모양대로이니 나날이 깊어가는 시배리아의 냉혹한 바람에 몸둥어리는 얼어터진 지가 오래이었읍니다.
순이의 늙으신 할아버지, 순이의 어머니, 그리고 순이와, 그의 젊은 사나이 두 사람, 중국 ‘쿨니’1)한 사람, 도합 여섯 사람이 끌려가는 일행이었읍니다.
‘뾰쪽삿게’2)를 쓰고 길다란 ‘빨도’3)를 입은 군인 두 사람이 총 끝에다 날카라운 창을 뀌여 들고 앞뒤로 섰어4) 뚜벅뚜벅 순이들을 몰아갔읍니다.
몸둥어리들은 군대군대 얼어 터저 물이 흐르는데 잇따금 뿌리는 눈보라조차 사정없이 휘갈겨 몰려가는 신새를 더욱 애끊게 하였읍니다. 칼날같이 산뜻하고 고초같이 매운 못찍한5) 무게 있는 바람결이 엷은 옷을 뚫고 마음대로 왼몸을 어여내었읍니다.6) 모든 감각을 잊어버리고 마치 ‘로폿트’같이 어대를 향하야 가는 길인지 죽엄의 길인지 삶의 길인지 아모것도 모르고 얼어빠지려는 혼(魂)만이 가믈가믈 눈을 뜨고 엎어지며 자뻐지며 총대에 휘몰려 쩔룸쩔룸 걸어갔읍니다.
“슈다!”
하면 이편 길로,
“뚜다!”
하면 저편 길로, 군인의 총 끝을 따라 희미한 삶을 안고 작고작고 걸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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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쿨니: 막일을 하는 중국인 노동자를 가리킴.
2)뾰쪽삿게: ‘삿게’는 러시아 모자 ‘샤프카’를 가리킴.
3)빨도: 외투를 뜻하는 러시아어. 망토.
4)섰어: 서서.
5)못찍한: 묵직한.
6)어여내었습니다: ‘어여내다’는 ‘에어내다’라는 말이다.
7)팔찜: ‘팔짱’의 경남 방언.
<<초판본 백신애 단편집>> <꺼래이>, 백신애 지음, 김문주 엮음, 2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