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시나 일기
일본 고대, 일기, 회고록, 일본 문학 신간 ≪사라시나 일기(更級日記)≫
다 잊고 지냈다
11세기 일본에 한 여자가 있었다. 인기 소설 ≪겐지모노가타리≫에 탐닉해 현실을 잊고 작품 주인공의 세계에서 헤매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렇게 생각한다. ‘도대체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온 것일까? 어쩌면 그렇게도 세상을 모르고 허상만 좇고 살았단 말인가?’ 열 살의 소녀가 쉰두 살의 여인이 되는 투명한 여정, ≪사라시나 일기≫를 만나 보시라.
사라시나가 무슨 말인가?
일본 고대 지명이다. 나가노(長野) 현에 해당한다. 일기 끝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읊은 와카(和歌)에 등장한다. 저자의 남편이 마지막으로 부임한 지방이다.
어떤 작품인가?
일본 대표 고전의 하나로 헤이안 시대 여류 일기 문학이다. 1008년에 태어난 저자가 열 살 때부터 쉰두 살까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쓴 회고록이다.
와카란?
일본 고유 정형시다. 5 7 5 7 7의 음수율을 띠고 있다.
작가는 누구인가?
지방관 다카스에의 딸이다. 중류 귀족이었다. ≪청령 일기≫를 쓴 미치쓰나 어머니의 이복 조카뻘이 된다.
이름은?
헤이안 시대 일반 여성은 이름이 없다. 남성 중심 귀족 사회에서 황족이 아닌 일반 여성은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라사키시키부나 세이쇼나곤같이 궁중에 출사해 여관(女官)으로 활동한 경우에만 호칭이 남아 있다. 문학 활동한 여성은 주로 아버지나 아들의 이름을 통해 불린다. ≪청령 일기≫의 저자는 아들 이름을 따서 미치쓰나 어머니, ≪사라시나 일기≫의 저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다카스에의 딸로 불린다.
헤이안 시대는 언제인가?
8세기부터 12세기까지다. 도읍인 헤이안쿄, 현재의 교토를 중심으로 화려한 귀족 문화가 꽃피었다.
여류문학이 발달한 이유는?
한문 중심의 중국 문화로부터 가나(假名) 중심의 일본 고유문화로 환경이 달라지면서 여자들도 쉽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또 섭정 제도가 실시되자 자기 딸을 천황비로 들여 권력을 잡으려고 한 귀족이 앞다투어 재능 있는 여성들을 발탁해 문예를 발전시켰다.
어떤 작품이 나타나는가?
대표 작품으로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겐지 모노가타리≫와 ≪무라사키시키부 일기≫, 당시의 궁정 사회를 그린 수필 ≪마쿠라노소시≫, 일부다처제에서 한 많은 여성의 삶을 그린 ≪청령 일기≫가 있다.
≪사라시나 일기≫의 개성은?
궁중의 여방 또는 특정인의 아내라는 위치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개인 경험 위에 서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엮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이 작품의 위치는?
헤이안 시대 여성의 일생을 가장 자연스럽고 안정된 문체로 그려낸 수작이다. 현대인이 공감하기에 가장 좋은 작품으로 꼽힌다. 서양에서도 회고록 또는 회상록 양식의 선구적 예로 소개하고 있다.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나?
열세 살 때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동쪽 지방에서 헤이안쿄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시작해 그 후 펼쳐지는 다사다난한 삶을 섬세하게 이야기한다.
여행 기록의 의미는?
본격 기행문으로서 매우 선구적인 작품이다. 당시에는 유람을 위한 여행이 거의 없었다. 장거리 여행은 지방관 부임 때 외에는 힘들었다. 긴 여정을 기록하고 감상을 쓰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물었다.
여성의 기록이라는 점이 이 작품의 가치를 더하는 요소인가?
남성 지방관이 업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동행한 여성이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각 지역을 소개하고 소회를 남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행문학은 서양에서도 여행이 자유로워지는 14∼15세기 이후에나 발달한다.
다른 기행문과 비교하면 어떤 점이 매력인가?
각 지역을 문학 감수성을 통해 소개한다. 자연 경관을 소개하거나 감동하는 식이 아니고 기존 문학작품이 만든 이미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우타마쿠라를 중심으로 여정을 쓰고 와카를 읊음으로써 각 지역을 문학 공간으로 승화시킨다.
우타마쿠라란?
문학작품, 특히 와카가 칭송하는 명승지를 뜻한다. 당시 사람들은 우타마쿠라(歌枕)에 가면 반드시 방문 기념으로 와카를 읊어서 기억, 혹은 기록에 남겼다. 가 보지 못해도 와카를 읊을 때 연관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우타마쿠라를 넣어 같이 읊었다
특정 지역의 지명인가?
아니다. 와카와 관련해 당시 귀족들이 공통적으로 연상하는 관념 코드가 우타마쿠라다.
일기문학으로 이 작품의 가치는 어떤가?
장거리 여행과 궁중 출사는 당시 여성에게는 귀중한 체험이었다. 특별한 일상 목적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 시점에서 꾸밈없이 회고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의 관점과 닿는다.
문학사의 눈으로 본다면?
당시 문학작품이 어떻게 유포되고 어떻게 향유되었는지, ‘문학’을 둘러싼 내외 환경을 동시에 살필 수 있다.
≪사라시나 일기≫의 주요 모티프는?
문학을 읽고 작품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이 책의 작가는 ≪겐지 모노가타리≫를 갈망한다. 당시에는 종이나 먹이 매우 귀했기 때문에 책은 귀족만 볼 수 있었다. ≪사라시나 일기≫에는 책, 곧 ≪겐지 모노가타리≫를 구하는 과정, 다시 말해 문학작품을 둘러싼 환경이 서술된다. 구한 작품을 읽은 뒤 현실과 괴리를 느끼고 현실을 직시해 가는 독자의 내면 심리가 묘사된다.
≪겐지 모노가타리≫가 궁금해지는데?
1000년경에 중류 귀족 여성인 무라사키시키부가 쓴 장편 소설이다. 겐지라는 한 남성의 영화로운 삶을 그렸다. 현재 일본 고전 문학 최고의 작품이다.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다.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으며 한국어 번역본도 나와 있다. 이른바 일본의 미의식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사라시나 일기≫가 현대 한국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당시 사회 관습에서 이상을 꿈꾸고 고뇌하며 살아가는 한 여성의 모습이 다가온다. 그녀는 문학을 매개로 꿈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며 인생을 걸어간다. 문학은 삶을 조명하는 장치다. 문학을 향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와 문학의 존재 가치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한 구절 감상할 수 있을까?
이런 구절이 있다.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이런저런 일들에 파묻혀 살다 보니 모노가타리 같은 것은 다 잊고 지냈다. 오로지 현실적인 생활에만 전념하려고 애쓰다 보니 점차 마음도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 무위로 지내면서 왜 근행이나 참배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지금까지 내가 미래에 걸었던 기대는 현실 세계에는 없는 허황한 것들뿐이었다. 히카루겐지 님처럼 멋진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말이다. 가오루 님이 우지에 몰래 숨겨 놓은 우키후네같이 복 많은 사람은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그동안 나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온 것일까? 어쩌면 그렇게도 세상을 모르고 허상만 좇고 살았단 말인가?’ 하고 마음속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도 착실한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 의지가 그것을 바꿀 만큼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라시나 일기≫, 다카스에의 딸 지음, 정순분·김효숙 옮김, 142쪽
왜 이 대목인가?
이상 세계만을 좇던 자신을 반성하고 현실 세계를 받아들이려는 고뇌가 섬세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한편 결심과는 달리 몸에 밴 습관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일기’가 아니라 ‘일기문학’의 매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당신은 누군가?
정순분이다. 배재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다. 헤이안 문학을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