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페의 희망 교육
올바른 실천의 기준
세상에는 두 가지 배움의 길이 있다.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는 학교와 사회가 가르치고 다른 하나는 현실과 친구가 가르친다. 로베르트 프란시스 가르시아와 친구들은 필리핀에서 민중교육을 실천한다. 그리고 묻는다. 민중교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판하는 것이고 반성하는 것이며 실천하는 것이고 창조하는 것이다. 노일경, 양희준, 유성상, 윤창국, 허준은 한국 사회에서 민중교육의 방향을 모색한다. 노일경에게 질문한다.
지금 한국에 이 책이 필요한가?
민중교육은 지나간 담론처럼 보인다. 1970~1980년대 운동권의 유물인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라. 민중교육이 ‘지금, 여기’의 말 그대로 ‘희망을 위한 교육’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민중교육이 희망이 있나?
민중교육이 지니고 있는 희망은 ‘누구’의 지식이라도 서로 소통될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민중교육의 ‘희망’은 ‘우리’의 지식과 가치가 모이고 실천으로 연결되면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다는 그 희망에 닿아 있다. 사회의 공동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데 민중교육의 이념과 방법론은 여전히 가치 있고 유용하다.
한국의 현실에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 한국에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책은 민중교육이라는 방법론을 선사할 수 있다.
어떤 책인가?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민중교육의 의미, 특히 담론과 필리핀 현실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민중교육의 의미와 특성을 밝히고 있다. 2부에서는 대표적으로 ‘개구리 세 마리’ 이야기와 ‘지도 그리기’ 이야기의 비유를 통해, 마지막 부록에서는 보다 상세하고 전문적인 담론과 필리핀 역사 속 민중교육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민중교육이란 무엇인가?
독자들은 이 책에서 ‘민중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측면과 층위의 질문과 답을 발견해 갈 수 있다. 기존의 민중교육 텍스트가 이론과 담론을 중심으로 한 ‘딱딱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면, 이 책은 ‘딱딱한’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우회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야말로 민중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텍스트를 전달하고 있다. 민중교육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민중교육’의 의미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한다. 물론, 더 ‘깊은’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를 위해 ‘부록’이 있다. 부록은 또 다른 ‘본문’의 기능을 한다.
필리핀 이야기 아닌가?
민중교육의 핵심은 이론과 실천의 부단한 상호작용에 있다. 프레이리, 호튼 등 서구 민중교육 이론가들이 제시한 민중교육 이론을 현장에 접목시키고, 그것을 ‘역사적’ 현장에 새롭게 이식하고, 변형하고, 재탄생시키면서 페페 특유의 민중교육을 구체화시켜갔다. 때로는 이론가로서 때로는 실천가로서 이론과 실천의 문을 넘나들며 제 역할을 하고 있는 페페 그리고 필리핀의 민중교육자들의 ‘공’이다. ‘민중교육’이 필리핀의 민주와 자유 혁명의 주요한 도구가 되어온 것을 오랫동안 목격한 필리핀 민중 그리고 필리핀 사회가 민중교육이 지니는 가치를 인정해 왔다는 것도 한몫했다.
페페의 민중교육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페페에서 말하는 ‘민중교육’의 주요한 가치는 ‘머무르지 않음’에 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소통과 변화가 없는 민중교육은 더 이상 민중교육이 될 수 없다. 프레이리가 말한 ‘의식화’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민중교육’이나 ‘의식화’는 지금까지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단일한 가치, 지식, 신념, 이념의 ‘전수’는 교조주의에 다름 아니다. 민중교육의 ‘아름다움’은 지식인도 교사도 끊임없이 ‘배우는 자’의 입장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오랫동안 쌓아온 신념과 가치도 바뀔 수 있고 변할 수 있다고 ‘겸손’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민중과 학습자와 열린 마음과 사고로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그것이 민중교육을 하는 일반론이지 않을까. 물론 어려운 일이다. 고통과 인내만이 함께 변화함이라는 열매를 가져올 수 있다.
필리핀에서만 가능한 얘기 아닌가?
페페의 민중교육 이념은 필리핀 역사의 특수성 속에서 구축되었다. 하지만 민중교육의 원리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민중교육은 프레이리가 말한 것처럼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억압’이 있고, 그래서 ‘해방’이 필요한 곳에서 민중교육의 이념과 방법론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것이 설령 다른 이름을 붙이고 나올지라도.
한국의 민중교육 역사가 110년이라고 한다. 다 어디 갔을까?
민중교육은 고인 물이 되어선 안 된다. 그만큼 ‘지금, 여기’의 희망과 접목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새로운 논의 지평을 열어내지 못한, 그리고 새로운 실천의 장을 발견하지 못한 교육이론가들의 잘못이 있다. 이론가와 현장 활동가와의 긴밀한 연계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사회운동 진영의 논리와 함께 자라난 한국의 민중교육론이 어느 선에서 수혈을 못 받았다고 표현해도 될까? 사회운동 진영은 ‘교육’의 힘이 갖는 잠재력에 대해 서서히 잊어가는 듯하고, 교육학자들도 새로운 논의와 실천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운동 분야와 손잡지 못했다. 이런 부적 상호작용이 가져온 결과는 아닐지.
민중교육은 스스로 변할 수 있을까?
교육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성찰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민중교육은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다시금 교육을, ‘희망’을 꿈 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민중교육이 희망교육이라는 주장은 희망에 불과하지 않을까?
민중교육이 희망교육이라는 말은 학습자에게 희망을 돌려주자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교육뿐 아니라 ‘희망’은 모든 교육에 내재된 가치가 아닐까. 교육은 지금보다 나은 나 또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교육에서는 학습자의 ‘희망’보다는 교수자의 ‘희망’, 국가의 ‘희망’, 지배자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정작 학습에 참여하는 ‘희망’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따라서 민중교육을 희망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 아니라, 교육의 본래적 의미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금 누가 민중인가? ‘민중교육’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을까?
민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어떤 표현으로 대체할 것인지는 여전히 숙제다. 그렇다고 ‘민중’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버리고 다른 말을 쓰는 일도 적절하지는 않다. ‘민중교육’은 여전히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