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냉소(冷笑)≫가 세상에 나온 1910년 전후는 근대 일본이 사회적, 사상적으로 큰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다. 메이지 신정부는 천황제의 전면적인 복권을 꾀하는 동시에 문명개화, 식산흥업, 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근대화 노선을 추진하는 한편, 극심한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통제했고 오래된 민중 문화를 병폐로 규정지었다. 민중이 부지런히 창조해 온 도시 상인과 장인의 문화,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천민 문화의 계보를 잇는 문화를 단절시키고 서양 모델에 맞춰 국가 주도형 문화 체제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나가이 가후는 메이지 유신 직후의 대격변기에 태어나 일본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서민의 눈높이로 국가의 동향과 사회의 정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밑바닥에 숨은 허망한 욕심을 일찍이 알아챘고, ≪냉소≫를 통해 메이지 유신 이후 아무런 반성도 없이 맹목적이고 무질서하게 문명개화를 꾀한 근대 일본을 기탄없이 비판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관료와 군부가 지배하는 메이지 이후의 사회 체제는 소통이 없는 꽉 막힌 시대이며 속물들이 신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졸부의 시대이자 사이비 문명사회라고 본 것이다. 피상적인 서양화와 근대화에 열을 올리던 시대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한 이 작품은 가후의 삶이 담긴 고백 소설이기도 하다. 작중 인물의 대화와 행동, 주요 장면의 묘사에서 가후의 사회관과 근대론, 예술론과 철학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 정신이 주인공의 고백을 통해 묻어난다.
100여 년 전 소설의 주인공이 던진 말은 우리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방향타를 상실한 채 드넓은 바다를 떠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불안도 느끼지 못하고 의문조차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표류는커녕 저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표정이 있는 작가, 나가이 가후는 ≪냉소≫를 통해 그렇게 묻고 있다.
200자평
물려받은 은행에서 명색뿐인 은행장으로 일하는 기요시는 속된 현실에 실망한다. 그는 한자리에서 세태를 마음껏 비웃어 줄 생각으로 시대와 보조를 맞추지 않은 괴짜 멤버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1910년 나가이 가후가 신인 작가로 주목을 받게 한 사상 소설이자 그의 삶과 정신이 담긴 고백 소설이다. 피상적인 서양화와 근대화에 열을 올리던 근대 일본 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지은이
나가이 가후[본명 소키치(壮吉)]는 1879년 12월 3일 도쿄 고이시카와 구에서 태어났다. 1894년 병에 걸려 입원하는 바람에 학업을 잠시 중단한 가후는 병원과 요양지에서 에도 시대의 통속 소설인 희작 문학을 탐독했다. 반년 후 복학했지만 학업에 흥미를 잃은 가후는 퉁소와 한시를 배우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897년 엄격했던 아버지가 일본 우선(郵船)의 상해 지점장이 되어 집을 비우자 유곽에 출입하면서 한학자의 아들답게 에도 음악, 만담, 우키요에 등에 빠져 지냈는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 있던 한문 서적을 내다 팔기도 했다. 1898년에 히로쓰 류로의 문하생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와야 사자나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에밀 졸라에 심취했다. 1902년부터 ≪야심(野心)≫, ≪지옥의 꽃(地獄の花)≫, ≪꿈의 여자(夢の女)≫를 발표했는데, 특히 ≪지옥의 꽃≫은 모리 오가이(森鴎外)의 극찬을 받아 인기를 끌었다. 1908년 가후는 8월에 ≪미국 모노가타리(アメリカ物語)≫를, 이듬해 3월에는 ≪프랑스 모노가타리(ふらんす物語)≫를 출간했지만 퇴폐적 내용과 일본에 대한 모욕적 표현 등이 문제가 되어 발매 금지를 당한다. 같은 해 12월부터는 아사히(朝日) 신문에 ≪냉소≫를 연재하면서 신인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1910년 모리 오가이와 우에다 빈의 추천으로 게이오대학 문학부 교수가 된다. 불어와 불문학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대문호들과 친분을 쌓는다. 1916년 대학과 심각한 의견 대립을 겪은 가후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신주쿠의 요초마치(余丁町)로 이사하는데, 자기 집을 단초테이라고 부르고 1917년 9월부터 여기에서 이름을 따 ≪단초테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단초테이 일기≫는 1959년까지 40년 이상 계속되어 가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이후 가후는 ≪힘겨루기≫를 비롯해 ≪에도 예술론(江戸芸術論)≫, ≪오카메자사≫, ≪장마 전후≫, ≪그늘의 꽃(ひかげの花)≫, ≪묵동기담(濹東綺譚)≫ 등의 작품을 남긴다. 1952년 에도 문학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뽑힌다. 말년에 두문불출하고 홀로 살다가 1959년 4월 30일 새벽 서재 겸 침실에서 피를 쏟고 쓰러져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 향년 80세였다.
옮긴이
인현진은 연세대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동양어문학과에서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의 유물론적 인식에 대한 고찰-≪상하이≫를 중심으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 오테마치(大手町)에 있는 주식회사 대한재보험 동경 사무소에서 통·번역 비서로 근무한 바 있으며, 영진전문대학과 영남이공대학, 한국IT교육원, 평생교육원 등에서 전임 강사로 일했다.
번역서로는 ≪구니키다 돗포 단편집≫, ≪요코미쓰 리이치 단편집≫,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 ≪씨앗, 그리고 열매≫, ≪하루 5분으로 만나는 일본문학 괴담편 : 인간의자≫, ≪귤(하루 5분으로 만나는 일본문학 대표작가 단편선)≫, ≪하루 5분으로 만나는 일본문학 동화편 : 화재와 포치≫, ≪가이코 다케시 단편집≫, ≪오카모토 가노코 중단편집≫, ≪하루 5분으로 만나는 일본문학 환상소설 편 : 묘한 이야기≫, ≪장마 전후≫, ≪하루 5분으로 만나는 일본문학 민담 편 : 원숭이 꼬랑지는 왜 짧을까≫가 있고, 저서로는 ≪시나공 JLPT 일본어능력시험 N1 문자어휘≫, ≪비즈니스 일본어회화 & 이메일 핵심패턴 233≫, ≪비즈니스 일본어회화 & 이메일 표현사전≫, ≪일본어회화 표현사전≫이 있다.
현재 기업체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번역에 힘쓰고 있다.
차례
냉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근대적 신사조에 물든 잘난 사람들이 아무리 최신 양복을 차려입고 자동차를 몰고 와도 안타깝지만 극장에는 세울 곳이 없다. 설령 자리가 있다 한들 정작 무대는 이런저런 면에서 약간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역시나 상투를 틀고 다니던 옛 모습 그대로다. 제아무리 셰익스피어가 훌륭하고 입센이 대단할지라도 기껏 흉내 내 봐야 결국엔 진짜배기에 미치지 못할 테고, 죽었다 깨어나도 지점(支店)은 본점(本店)을 뛰어넘을 수 없는 법이다. 나카타니는 화창하게 맑은 날, 당대의 신사들이 2층 관람석이나 바둑판 모양으로 칸을 나눈 아래층 관람석에 끼어 앉아 옛날에 못 배운 자들이 눈으로 익혀 벌이는 황당무계한 연극을 보고 사는 심정을 딱하게 여기며 냉소를 보냈다.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