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침묵에 도전하는 인간의 질문, 컴북스이론총서가 던지는 23가지 테제
세계의 침묵에 도전하는 인간의 질문, 컴북스이론총서가 던지는 23가지 테제
과학은 위험을 확률로 부르고 법은 책임자의 이름을 찾지 못한다. 반성의 시간은 사라졌다. 순간의 현안에 휘둘리는 사회 시스템은 자가당착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주의자, 아이러니스트. 자신을 쓰고 다시 고쳐 쓰면서 스스로를 완성해 간다. 시민과 대화하고 연대하고 공명한다. 그다음은 굴욕과 고통을 척결하는 개혁이다. 인간은 어떻게 도구가 된 이성과 결별하고 우연과 아이러니와 연대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까?
세계의 침묵에 도전하는 인간 사유의 로망, 컴북스이론총서가 침묵하는 이 세계에 대답을 촉구하는 23가지 질문을 던진다.
우리로부터 선과 행복은 얼마나 먼가? 선과 행복이 무엇인지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공공을 위한 노동과 개인을 위한 노동이 교대로 일어나는 리듬 속에, 축적되자마자 곧 재분배되는 부 속에 선과 행복이 있다. 서로 주고받는 존경과 후함, 곧 증여의 논리다. ‘고귀한 지출’의 관습으로 우리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셀 모스, 증여론≫, 류정아 지음 |
정의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있는가? 응보에서 사회 정의까지 수많은 정의의 관념이 있다.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도 다양하다. 누구나 정의를 말하지만 합의 가능한 정의의 논리는 부족하다. 정의가 상실된 시대에 어디서 정의를 찾고 세울 것인가. 여기 단일한 정의의 원칙이 있다. ≪존 롤스≫, 이종은 지음 |
인간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인가? 기술철학의 가치는 그 실천성에 있다. 현대 기술을 이해하는 것, 궁극적으로 기술사회 문제에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기술철학의 책무다. 기술철학은 현실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발전하는 개별 기술들 모두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기술철학이 답하려는 것은 기술의 문제, 곧 인간의 문제다. ≪랭던 위너≫, 손화철 지음 |
합리성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가? 신고전파경제학은 완전한 합리성을 지닌 인간을 가정한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은 합리성, 제한된 합리성, 비합리성을 지닌 인간이 현실 모습과 더 가깝다. 인간은 때로 이타적이며 강한 상호성을 갖고 있다. 사회적 규범과 문화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인간을 전제로 할 때 공유자원의 딜레마를 푸는 실마리가 드러난다. ≪엘리너 오스트롬, 공유의 비극을 넘어≫, 강은숙·김종석 지음 |
음악은 명사인가, 동사인가? 음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뭔지 묻는 것보다 현실 연인 사이의 실천적 관계를 살필 때 사랑의 실제가 드러난다. 문화주의와 인류학적 방법론을 수용한 음악학은 음악의 실제에 파고든다. 새로운 음악학은 소외되어 왔던 이들, 바로 우리 자신을 무대 중앙에 올려 세운다. ≪크리스토퍼 스몰, 음악하기≫, 최유준 지음 |
근엄한 근대를 의심하는 이유가 뭔가? 접촉지대는 이종 문화가 만나고 부딪히고 싸우는 사회적 공간이다. 지배와 복종, 식민주의와 노예제도의 비대칭 권력이 엇갈려 배치된다. 식민자와 피식민자는 서로 무관하고 분리되어 있지 않다. 순수하게 중심적이지도 주변적이지도 않은,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담론이 여기서 구성된다. 유럽 중심의 모더니티를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다. ≪메리 루이스 프랫, 제국의 시선≫, 김남혁 지음 |
굴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있는가? 철학적 문화는 문학적 문화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이론과 실천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려는 철학자들의 시도에 동참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이자 아이러니스트인 우리는 사적 영역에서는 자신에 대한 재서술로 자기완성을 꾀할 것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동료 시민들과 대화하고 연대하여 굴욕과 고통을 없애기 위한 개혁에 나설 것이다. ≪리처드 로티, 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 이유선 지음 |
문명이 선할 수 있는가? 문명이 좀 더 좋은 상태를 향해 진보한다는 통념은 한낱 믿음에 불과할지 모른다. 진보라는 개념은 거대 기계와 거대 도시의 목적 없고 의미 없는 팽창과 동의어였다. 전쟁과 나치즘의 발흥은 문명인이 맹수보다 더 잔혹하고 야만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인간은 다시 건전한 문명의 길로 올라설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루이스 멈퍼드≫, 문종만 지음 |
공간은 어떻게 사회가 되는가? 공간은 ‘사회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한다.’ 공간의 사회화는 인간의 신체를 둘러싼 겹겹의 관계들의 얽힘과 그것들이 만드는 이질적 층위를 투과하는 과정이다. 사회적 공간론은 마르크스의 생산관계론과 그 유토피아적 전망의 의미를 공간적 차원으로 이전하여 수정하는 작업이다. ≪앙리 르페브르≫, 신승원 지음 |
사회과학의 문은 언제부터 닫혀 버렸는가? 사회와 공간이 고체에서 액체로 변하고 있다. 사회를 정태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보지 말고 동태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모빌리티 패러다임’ 또는 ‘모빌리티 전환’은 정태적, 고정적, 폐쇄적 사회과학을 탈피하여 동태적, 유동적, 개방적 사회과학을 지향한다. 정주주의와 유목주의의 변증법, 부동성과 이동성의 변증법이다. ≪존 어리, 모빌리티≫, 이희상 지음 |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도시화는 특정 이익집단이 도시 잉여물을 사적으로 전유하고 파괴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 도시화에서 초래된 위기를 극복하려면 도시가 공유재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도시권은 집단적으로 생산된 공유재로서 도시 잉여물을 민주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도시혁명은 시민의 의지와 희망에 따라 도시를 건설할 때 가능해진다. ≪데이비드 하비≫, 최병두 지음 |
확률은 위험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 위험은 나누고 공유하고 되돌릴 수 없다. 일회적이다. 그러나 과학은 위험을 확률로 표현하고 법은 위험의 책임자를 규명하는 데 실패한다. 산업사회 제도에서 위험의 객관성은 사라져 버린다. 무차별적인 불안만 계속 유포된다. 사람들은 반성할 시간을 빼앗긴다. 매 순간의 현안에 휘둘린다. 사회 시스템은 자가당착에 빠진다. ≪울리히 벡≫, 홍찬숙 지음 |
강자를 소비하는 약자의 전술은 무엇인가? 소비는 약자가 강자의 시공간을 이용하는 전술이다. 팽창주의적, 중앙집권적 생산은 소비라는 전혀 다른 생산과 직면한다. 소비자는 지극히 유동적이고 다차원적 정체를 갖는다. 그들은 지극히 활동적이고 전복적으로 행동하며 타인이 생산한 상품과 메시지, 공간과 제도를 소비한다. 소비는 지배의 전략과 저항의 전술이 충돌하는 전장이다. ≪미셸 드 세르토, 일상생활의 창조≫, 장세룡 지음 |
말은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 냈는가? 총체로서 영화 담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 구성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자신만의 랑가주를 만들어 낸다. 이미지들이 연결되면, 그 위에 다양한 랑가주들이 중첩되면, 반드시 의미작용이 일어나고 관객은 그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영화는 랑가주, 이야기를 매우 잘하는 랑가주다. ≪크리스티앙 메츠≫, 이수진 지음 |
인간은 어떻게 시각정체성을 생산하는가? 애플 로고의 특징은 IBM 로고와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샤넬룩의 고전미는 바로크와 대조된다. 하비타트는 이케아와, 오피넬은 스위스 군용칼과 상반된다. 브랜드의 시각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브리콜라주를 통해 변형하는 역동적 체계다. 차이가 지속되는 과정이다. 시각 정체성의 인식이 곧 시각 정체성을 생산한다. ≪장마리 플로슈, 시각 정체성≫, 권승태 지음 |
이데올로기로 문학을 비평할 수 있는가? 문학은 사회 변화의 내용을 파악하고 재구성한다. 새로운 경험을 습득하고 흡수할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 곧 문학은 사회적 경험을 범주화하고 전달하며 공동체적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고 활성화한다. 따라서 문학과 문학비평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넘어선다. 유물론적, 역사적 지평 위에 문학이 놓여야 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박만준 지음 |
운명을 결정하는 행동, 버릇이란 무엇인가? 아비튀스는 버릇이다. 버릇은 사회적이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집단적이라는 것,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와 행위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만의 사고와 행위는 동일 계급과 집단 아비튀스의 한계 안에 분포하는 편차에 불과하다. 우리의 사고와 생각, 행위를 낳는 것이 바로 아비튀스다. ≪피에르 부르디외≫, 김동일 지음 |
신화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을까? 현대의 인류는 고대인들의 낙원을 잊어버렸다. 기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화적 시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환상문학은 현재에서 신화적 시간으로의 이동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필연이라는 공포로부터 벗어나, 실제 안에 갇히지 않고 열린 세계를 지향한다. 문학에서 기호와 상징을 읽어 내는 일이 바로 창조적 해석학의 임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슨지에네의 밤≫, 한성숙 지음 |
이성의 사회에서 개인은 어디 있는가? 인간의 자기보존 욕망은 자연지배 논리를 낳는다. 자연지배는 자연의 수학화, 양화를 가속한다. 자연지배는 다시 계급 지배, 성 지배, 동물 지배로 이어진다. 이 바탕에 도구적 이성이 있다. 도구적 이성은 내적 자연을 지배하고 억압과 통제 기제로 작용한다. 개인의 경험과 상상력이 훼손된다. 그 결과는 개인의 위기와 죽음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 이하준 지음 |
인류는 언제부터 하나였는가? 정체성의 정치학은 말해 왔다. 정치적 권익을 주장하는 운동에는 그 주체가 분명한 범주로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단일한 범주로서 정치적 주체는 그에 포함되지 못하는 소수자를 다시 한 번 밀어낸다. 정체성의 범주는 다양성과 다변성에 열려야 한다. 여기서 정체성의 정치학은 비정체성의 정치학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지음 |
우리는 어쩌다 껍데기가 되었는가? 현대 소비사회는 시뮬라시옹의 시대다. 사물 그 자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이미지, 곧 기호가치를 소비한다. 현대사회의 주체는 이미지와 기호라는 허상, 껍데기에 사로잡힌 채 이를 소비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이미지가 만들어 낸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한다. 주체와 객체가 전도된다. ≪장 보드리야르≫, 최효찬 지음 |
인간의 실패는 어떻게 성공에 도달하는가? 사무엘 베케트는 말한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성공은 실패를 경유하며 조금 더 잘 실패하는 것이다. 실패의 변증법이다. 혁명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당장 시도하라. 실패를 두려워 말라.” 행위는 반복이고, 반복의 본성은 혁명에 있다. 반복이 혁명인 이유는 그 반복이 매번 차이를 휘돌아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최영송 지음 |
현대 예술은 왜 피곤한가? 현대 예술은 열린 구조가 특징이다. 작가 또는 발신자는 모호하고 확정되지 않은 작품을 제공한다. 수신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미학적 메시지의 수신자는 작가의 전략에 상응해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을 자유롭게 해석한다. 열림의 구조적 전략은 바로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들자는 권유다.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지음 |
2854호 | 2016년 5월 3일 발행
세계의 침묵에 도전하는 인간의 질문, 컴북스이론총서가 던지는 23가지 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