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동·윤극영 동시선집
2574호 | 2015년 5월 6일 발행
지만지 한국동시문학선집 100종 출간 특집 3. 조선 동요의 황금기
장정희·전병호가 엮은 ≪한정동·윤극영 동시선집≫
우리 뼈에 새겨진 노래들
반달, 설날, 고기잡이는 윤극영, 퐁당퐁당은 윤석중, 봄편지는 서덕출, 따오기는 한정동,
고향의 봄은 이원수가 짓고 온 백성이 함께 불렀다.
조선의 1920년대는 동요의 시대였다.
모두 노래하고 함께 북받쳤다.
반달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한정동·윤극영 동시선집≫, 한정동·윤극영 지음, 장정희·전병호 엮음, 99쪽
언제 어디에 발표되었나?
≪어린이≫ 1924년 11월 호에 실렸다.
창작 배경은?
맏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누이는 다섯 살 때 가평으로 시집가서 20여 년간 친정에도 오지 못하고 출가외인으로 살았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윤극영은 수필 <반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동포가 느끼는 비운, 점차 자기를 잃어 가고 있는 우리들의 느낌을 쏟아 넣는 데 열중했다.”
대중의 반응은?
만주 용정, 일본 동경, 러시아 하얼빈에서도 동포들이 망국의 설움을 달래면서 <반달>을 불렀다. 누이를 잃은 시인 개인의 정한이 나라 잃고 비탄에 빠진 백성과 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자주독립의 의지를 북돋는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
윤극영은 몇 편의 동요를 남겼나?
≪윤극영 전집≫에 의하면 직접 작사·작곡한 동요는 69편, 곡을 붙이지 않은 동시가 73편, 총 142편으로 집계된다. 동요집에 수록되지 않은 동요도 상당수 있다.
설날과 고기잡이도 그의 작품인가?
그렇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로 시작하는 <설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가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가나”로 시작하는 <고기잡이>도 그의 작품이다.
동요를 천착한 계기는?
방정환의 영향이다. 1923년 그는 윤극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어린아이들이야. 그들에게는 우리의 노래도 없다. 윤극영, 어린이에게 줄 노래를 지어라. 그들은 10년, 20년이 흐르면 바로 우리나라를 지고 갈 역군이다.” 윤극영이 쓴 수필 <소파 방정환>에 실린 구절이다. 이 말이 그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고 한다.
아동문학사에서 윤극영의 기여는 무엇인가?
1923년 동경에서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했다. ‘어린이’ 용어를 보급하고 ‘어린이 날’을 제정했다.
당시 조선 어린이의 노래는 어떤 것이었나?
찬송가 곡을 빌리거나 일본 노래뿐이었다. 그는 이를 분히 여겨 우리말과 우리 정서를 담은 동요를 만들고 퍼트렸다.
당대의 동요시인은 또 누가 있나?
<퐁당퐁당>의 윤석중, <봄편지>의 서덕출, <따오기>의 한정동, <고향의 봄>의 이원수다.
동요시와 동시는 어떻게 다른가?
가장 큰 차이는 운율이다. 동요시는 정형률을 따른다. 동시는 내재율을 지닌다. 윤석중은 “노래처럼 지은 시가 동요이고, 시처럼 지은 노래가 동시”라고 했다.
동요가 당시를 풍미한 이유는 뭔가?
동요 보급은 개화기 때 문화 운동의 성격을 띠고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창가의 전통도 한몫했다.
동요 황금기는 어디로 이어지는가?
가창 동요, 시적 동요는 동시로 넘어간다. 정지용·윤동주·박목월도 동시를 지었다. 일간지나 문학지에 동시가 발표된다. 놀라울 정도의 외형 발전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전병호다. 시인, 아동문학가이고 평택 군문초등학교 교장이다.